환상기담

아는척할정도의 얕고 넓은 한국역사지식

인문 겉핥기

친일파에게 경고하다.

기묘담녀 2025. 3. 2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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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나라의 법을 신에게 적용하여 드러내놓고 처단함으로써 세상의 신하와 자식으로 된 사람들로서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계할 줄 알게 한다면 신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되겠습니다.
노응규, 상소를 올리다.
고종 37년(1897년) 10월 1일, 진주의 유생 노응규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도끼를 들었다.

도끼의 날은 많이 상해 날도 뭉뚝하고, 여기저기 날도 많이 상해 이 도끼로 나무나 제대로 팰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노응규에 눈에는 이마저도 든든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

"꼭, 가야만 하겠는가?"

때마침 곁에 있던 남자가 그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학부대신 신기선으로 법무대신 조병식과 더불어 노응규의 궁궐행을 돕고 있었다.

"이보게, 이제 나에겐 더이상 잃은것이 없다네.."

노응규의 눈빛에는 더이상의 두려움도 없었고, 또한 뜻을 굽힐 마음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수많은 겁을 집어먹은 수많은 친일파들 앞에서 도끼를 든채 당당하게 선 노응규는 그렇게 자신의 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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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복수를 위해 의병하다.

 

노응규는 진주에 유생으로 도끼를 든채 지부자현소라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 인물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소식이 온 나라에 삽시간에 퍼지고 각 지방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들과 친일파에 대한 복수가 시작되었고, 그중에서 김해쪽에서 일어난 인물이 바로 노응규이다.

순식간에 진수성을 함락한 그는 김해까지 진출하지만 내부의 배신으로 결국 아비와 형제가 죽고 가산을 몰수당하고 만다. 한양에서 친일파에 의해 자신의 규명을 바라는 유생들의 축출소식을 접한 그는 한양으로 올라와 이번일을 벌이게 된다

대한문앞 명성황후의 국장,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은 각 지방의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출처:위키백과)

 

자신의 억울함과 함께 전달한 경고

 

직접  전달했기에 이번엔 누구도 그의 상소를 막을 수 없었다.

노응규의 상소는 자신의 큰 죄인이니 자신을 벌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네가지로 나누었는데 그 첫째는 온나라가 명성황후의 죽음으로 하다못해 아이들과 부녀자마저도 주먹을 쥐며 복수를 다짐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좀 더 배운자로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라의 원수도 갚지 못했고 아버지와 형이 죽는 일을 막지 못한죄.

둘째는 군사들이 내려오던 날, 자신은 화살을 하나도 쏘지 못하고 스스로 잡히지 않고 도망친 죄(사실 노응규는 다른곳에서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셋째, 아버지와 형이 죽은지 이미 오래지만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채 상복도 입지 못하고 있는 죄.

마지막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졌지만 자신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채 평범하게 먹고 입는것이 죄라 말했다.

다분히  고종의 주변에 있던 친일파들에 대한 경고가 섞인 상소였으며, 노응규는 자신을 국법으로 다스려 나라의 본을 다해달라는 말로 상소를 마친다.

나라의 충을 보여야 하는 인물들이 오히려 일본의 편을 들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났던 노응규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나는 모습 아닐까?


고종의 비답

 

고종은 도끼를 든 노응규에게 즉각 비답을 내려준다.

"네가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으니 가상하다. 깨닫고 개진하는 것이 너의 도리일 것이다."

 

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노응규는 고종이 하사했던 관직을 벗어버리고 다시 의병이 되는데, 고종은 은밀히 그에게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기까지 한다.

왕이지만, 친일파들에게 둘러쌓여 두손과 두발이 묶여버렸던 고종에게 노응규는 자신의 뜻을 대신 이루어줄 손이지 않았을까?

고종, 그는 치일파 신하들에게 둘러쌓여 무슨생각을 했을까?(출처:위키백과)


뉴스를 보면, 일본의 대한 뉴스를 많이 접하게 된다.
아직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어두운 모습은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에 살아 숨쉬는 듯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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