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트립-내가모르는 궁궐이야기 (9) 썸네일형 리스트형 향원(香遠), 정자하나 우뚝 서 있다. 〈경복궁의〉 후원(後苑)에 신정(新亭)을 낙성(落成)하니... 이름은 ‘취로정(翠露亭)’이라 하고 앞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게 하였다. 세조 2년 경복궁 후원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팠다 그곳이 지금의 향원정 자리이다. 향원지에 지금의 향원정이 세워진 것은 고종때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 향원정의 향원(香遠) 은 "향기가 멀리 퍼진다" 라는 뜻으로 학자 주돈(1017∼1073)이 지은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곳에 나오는 왕과 왕족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본래 향원정으로 가는 다리는 현재의 근정전방향이 아닌 고종이 기거하던 건청궁 방향인 북쪽에 나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무너지고 복원을 하며 현재의 자리로 이동하였다.도깨비 소행? 고종은 향원정을 총 450개의 전등으로 밝혔다고 한다. 450개의.. 경복궁 도서관, 집옥재 집옥재(集玉齋)에서 각 국 공사(公使)를 접견하고 이어 사찬(賜饌)하였다. 고종 30년, 집옥재에서 각 국의 공사들을 접견했다는 실록의 기록이다. 경복궁 안쪽에 있는 집옥재는 고종의 서재였으며 동시에 외국 사신들의 접견장소이기도 했다.경복궁엔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경복궁을 썼던 고종의 노력이 여기저기 남겨져 있다. 집옥재는 본래 창덕궁에 별관으로 지어졌는데 1876년 경복궁에 불이나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재건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서재와 접견장소로 쓰인 건물 집옥재는 고종의 서재로 쓰였는데, 외국 공사들의 접견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집옥재는 팔우정과 협길당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왼쪽 팔우정은 팔각 정자처럼 서있고 협길당 앞에 계단이 놓여있는데, 당시 최신건축기술인 중국의 영향을 받아 .. 김구의 마지막, 경교장 탕, 탕, 탕, 탕 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40분, 조용하던 경교장에 네발의 총성이 울렸다. 종로구에 강북삼성병원에는 오래된 건물이 하나 신식건물에 둘러쌓여 있다. 이곳은 왜 이토록 보존되고 있는 걸까? 광복과 임시정부인사들 나라가 갑자기 광복을 맞이했다. 상해 임시정부인사들은 나라의 광복을 갑자기 맞이했고, 타지생활을 정리하고 그토록 지키려 했던 그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온 고국에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너무 오래 외국생활을 했으며, 가진 재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이 자신이 지은 건물을 주며 그 곳이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되었다. 그곳이 경교장이다. 완공당시의 이름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이였던 것을 김구가 근처에 있.. 국모, 명성황후의 마지막 묘시(卯時)에 왕후(王后)가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 고종 32년 8월 20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명성황후, 조선의 국모였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곳, 곤녕합에서 마친다.궁궐안의 궁(宮), 건청궁 건청궁은 경복궁안에 있는 전각중 유일하게 궁(宮)이라고 붙은 건물이다. 말하자면 궁궐안에 또다른 궁궐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왕과 왕비가 생활했던 공간으로 실제 보면 궁이라고 하기보단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건물과 흡사하다. 건청궁은 총 세개의 건물로 이루어져있는데, 왕이 기거했던 장안당, 왕비가 기거했던 곤녕합, 외국사신들의 응접실로 쓰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져있었지만 현재는 현대식 건물이였던 관문각은 터만 남아있다. 건청궁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좀 있는데, 궁궐안에 "궁"이.. 왕의 사후에 머물던 곳, 태원전 제1실과 제3실의 어진(御眞)을 태원전(泰元殿)에 이봉(移奉)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고종 9년에 고종은 명을 내려 태조의 어진을 이곳으로 옮긴다. 태원전은 고종이 지은 일종의 제사건물로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왕자출신이 아니였던 고종은 매번 흥선대원군과 정통성에 대해 시비가 붙었고, 왕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를 주기위해 이 건물을 중건하게 된다. 본디 태원전은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용도로 쓰였지만 이후 명성황후의 빈전으로 사용되었고 왕족에 관한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기능을 하는 건물은 원래 존재하지 않다가 왕이 승하하면 임시거처를 만들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사용되었는데 태원전이 생기고 이곳을 해당 기능을 하는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태원전의 정문.. 궁궐안에 흐르는 샘, 열상진원 차고 맑은 물의 근원 경복궁 안에서 흐르는 샘이 하나있다. 궁 안에 샘이 있다는 말에 의외다 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 옛날 궁궐사람들의 목을 축여주던 샘이 바로 "열상진원샘(洌上眞源)"이다. 샘의 위치는 근정전 뒤 향원정 뒤쪽으로 한쪽에 네모난 뚜껑에 덮혀있다. 경복궁의 뒤에 있는 산인 북악산에서 나오는 지하수로 경복궁 창건때부터 있던 샘이다. 이샘은 향원정을 채우고 향원정 지하에 연결된 통로로 흘러 경회루를 채운다. 물론 먹지 못할 물은 아니다. 주변을 고려한 유려한 축조방법 이 샘의 축조방법은 향원정에 물결을 일으키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총 3번의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번에 물이 내려올때 생길 수 있는 물의 파동을 최소화 하여 향원정의 물이 잔잔하게 유지되도록 하며, 마지막은 동.. 경복궁 근정전 가는 길 근정전으로 가는 길은 크고 웅장하다 경복궁을 들어가면, 근정전으로 가는 길이 크고 웅장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근정전의 큰 모습에 반하여 주변을 잘 보지 못한다. 그 넓은 곳에 커다란 건물하나만 서있는 곳, 그곳으로 가기위한 길은 몇가지 였을까?궁의 신하들이 다니던 길, 회랑 경복궁의 근정전을 빙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있는 긴 복도, 이것을 우리는 "회랑"이라고 부른다. 회랑의 특이점은 바닥은 흙이며, 지붕이 있다. 조선시대에 회랑은 신하들이 다니는 길로 함부로 근정전의 마당(?)으로 걸어다닐 수는 없었으리라. 왕의 어도, 그리고 품계석 근정전으로 가는 길, 중앙에 다른 곳과는 다른 잘 깍은 돌로 살짝 높게 깔린 길이 있다. 이를 우리는 "어도"라고 부른다. 어도는 왕이 다니는 길로, 왕과 왕을 .. 경복궁을 홀로 지키고 있는 망루, 동십자각 경복궁을 홀로 지키고 있는 망루, 동십자각 광화문을 나와 광화문 오른쪽으로 이어진 돌담 끝에 도로 가운데 홀로 서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동십자각"이라고 불리는 그 옛날 궁을 지키던 망루가 지금은 그 쓰임새를 다 하고,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성의 정문, 양 끝을 지키던 망루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을 가운데로 성벽 양끝에 성 밖을 감시하기 위한 곳으로 망루가 하나씩 있었다. 동쪽을 지키는 망루인 "동십자각" 그리고 서쪽을 지키는 망루, "서십자각" 하지만 지금은 서십자각은 사라지고 동십자각도 현재 성벽과 연결되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십자각의 현재모습과 서십자각이 사라진 시기를 보통 일제강점기시대로 알고 있다. 그전까지의 사료에 의하면 서십자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두 망루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