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기담

아는척할정도의 얕고 넓은 한국역사지식

설화(說話), 한국의 신비한 이야기들

7일만에 남편을 잃어버리다.

기묘담녀 2025. 2. 3. 08:21
728x90
중종의 폐비(廢妃) 신씨(愼氏)가 사는 사제(私第)에 전에는 내관(內官)을 차출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지공(支供)하는 도움도 없었으므로 내가 매우 미안하니, 이제부터는 폐비궁(廢妃宮)이라 부르고 모든 일을 자수궁(慈壽宮)의 예와 같이 하라.

 

인종 1년, 중종의 폐비였던 신씨가 살던 곳을 폐비궁으로 격상하고 예를 다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폐비신씨, 그녀는 누구였을까?


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에게는 사가에서 이미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신씨였는데 보통 남편이 왕이 되었다면 그녀는 중전이 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정공신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중전을 세울것을 요청하였고, 결국 7일만에 신씨는 폐비가 되어 궁궐 밖으로 쫒겨나게 된다.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동안 왕비를 했던 인물 신씨, 그녀는 왜 7일만에 쫒겨났던걸까?

 

728x90


그 이유는 연산군에게서 찾을 수 있다.

신씨의 집안은 대대로 왕족과 연결되어 있던 집안이였다. 덕분에 중종이 왕이 되기 전 그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으며 연산군과도 친척과도 같은 집안이였던 것이다.
반정이 일어나기 전 반정을 꾸미던 이들은 신씨의 아비에게 반정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신씨의 아비는 오히려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왕위에 앉힐 수는 없다며 거절하게 되는데 이로써 반정 성공을 위한 첫번째 척결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딸이였던 신씨는 비록 중종의 아내였지만 집안이 역적의 집안이였으므로 그녀가 왕비로 남을 경우, 반정에 대한 정통성이 흔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인왕산에 내려오는 치마바위 전설은 중종과 관련있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전설

 

그렇게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폐비가 되었고, 그렇게 자신의 지아비와 떨어져 사가에 지내야 했던 그녀를 중종은 안타까워했으며 마음에 품고 있었다. 왕이라는게 자신의 마음이 중요시 될 수 없었으리라. 또 반정공신들의 말을 따를 수 밖엔 없었던 왕.. 인왕산에는 치마바위 전설이라는 것이 내려오는데 둘의 애끓는 애정이 묻어나는 전설일 수 밖엔 없다.

신씨는 자주 중종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인왕산으로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았다. 궁궐에서 입던 다홍색의 치마를 바위에 펼쳐두고 한참을 슬퍼하다 내려가곤 했는데, 이는 중종도 그 애뜻한 마음이 닿아 자주 인왕산을 올려다 보았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종은 실제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러 갈때마다 신씨의 사저 근처에서 머물렀다고 하며, 말을 신씨에게 보내면 항상 신씨는 흰죽을 쑤어 돌려보냈다고 하니 중종도, 신씨도 안타까운 사랑을 이어갔던 것은 아닐까?


중종의 능, 정릉

 

신씨의 복위가 논의되다.

 

신씨 다음으로 중전이 된 장경왕후가 죽고 다시한번 신씨에 대한 이야기가 궁궐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즈음 여러가지 천재지변이 자주 일자 중종이 내린 구언교를 통해서 였다. 구언교란 왕의 잘잘못을 고하면 고치겠다는 일종의 회계같은 것이였는데. 신씨의 폐위는 잘못된 일이였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폐비신씨의 복위는 결국 이루어 지지 않았다. 권력으로 인해 생이별을 하고 평생을 중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았을 그녀 신씨는 그래도 자신을 잊지 않아 준 중종이 있었기에.. 행복했을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