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신하들과 함께 조정의 일을 함께 해 간다면 금갑(琴匣)의 변과 편조(遍照)의 화가 오늘날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중종 34년,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유교국가였던 조선에 절은 필요 없으니 봉은사와 봉선사를 철거해달라는 올라온 상소문 중 일부이다.
편조(遍照)는 불교국가였던 고려 시대 때의 유명한 승려인 신돈의 법명으로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손에 쥐고는 온갖 음란한 일들을 자행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급갑(琴匣)의 변은 무엇일까?
정월대보름의 유래
금갑(琴匣)은 사금갑(射琴匣)을 뜻하는 말로 사금갑의 대한 설화는 정월대보름의 유래가 되는 전설 중에 하나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소지왕 때의 일로 소지왕 10년, 새해가 밝고 15일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기 위해 궁을 나서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중 쥐가 사람의 말로 말하길,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십시오"
소지왕은 이일을 기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한참을 따라간 신하는 남쪽의 피촌(避村), 현재의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이르러 두 돼지가 싸우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만다.
결국 신하는 까마귀를 찾기 위해 주변을 배회하던 중 서출지에서 나온 노인이 그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는데 그 봉투 겉면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소지왕은 편지를 받아들고는 그 편지를 열어보지 않기로 했는데 이유는 만약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두 사람이 죽는 일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던 관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 관리는 소지왕에게 고하길,
"두 사람은 서민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
결국 그의 말에 소지왕이 편지를 열어보았고 편지 안에는 단 세 글자만이 쓰여있을 뿐이었다.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라
사금갑(射琴匣)이라는 글자는 거문고의 갑을 쏘라는 말로, 거문고를 넣는 상자를 말한다.
소지왕은 활을 들어 거문고 갑을 쏘아 맞추었고, 화살에 맞은 거문고 갑을 열어보고는 소지왕은 경악했는데 그 안에는 자신의 후궁과 한 승려가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소지왕의 후궁과 그 승려는 서로 불륜 관계로 소지왕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고, 심지어 왕을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걸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까마귀에게 감사하다.
결국 진상이 밝혀진 둘은 사형을 당하고, 소지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까마귀를 위해 매년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까마귀에게 찰밥을 지어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는데 찰밥이 세월이 지나며 약밥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생각들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불교를 탄압한다. 연산군 때에는 모든 승려들을 관노화 시켰고, 중종 때는 한양도성에 있던 사찰의 폐지와 사찰에 있던 불상들을 녹여 무기로 만들기까지 했다.
어떤 종교가 우월할까? 종교를 떠나 누군가가 우월할 수 있을까? 중종은 다행히도 봉은사와 봉선사의 폐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신라 때부터 고려 시대까지 부흥했던 불교는 고려 말기 타락하고 만다. 그 모습에 질려 조선 건국 때 불교를 배척했지만 그들이 믿던 유교 역시 결국 똑같은 전철을 밟고 만다.(여성들의 탄압과 타 종교 배척 등)
그 모습이 결국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이런 상소문을 올리게까지 만든 결과로 이어진 건 아닐까? 과연 유생들은 자신들이 주장한 것들이 대한민국의 위대한 문화와 역사를 왜곡하려 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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