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기꾼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다 '봉이 김선달'을 떠올리지만 김선달은 실제인물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사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 사기로 인해 사람까지 죽은 사건을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문종1년, 궁의 관리였던 김관의 아내 금이에대한 사건이 문종에게 올라온다. 관리의 아내가 저지른 사기사건은 어떻게 벌어진걸까?
양반집 아내, 사기로 포목을 훔치다.
사건은 이러했다.
금이가 시종 둘을 이끌고 주인이 외출을 한 빈집에 들어가 백미라는 집을 지키던 종을 불러 자리를 비운 주인을 잘 아는 듯 행세하며, 포목을 중개하는 중개인을 부른다.
마치 시종인 백미를 주인으로 보이게 하여 포목에 대한 가격협상을 진행하다가 내일 다시 가격협상을 하자며 포목(비단)을 두고 가도록 하고 비단을 챙겨 나온 사건으로 시작했다.
다음날 중개인이 집에 왔을땐, 포목도 금이도 없었고 집을 지키던 시종인 백미만이 남아 있을 뿐이였다. 중개인은 백미를 묶어 끌고 가 모진 고문을 진행한다.
결국 몇일 후 백미는 목부분에 칼로 찔린 상처로 죽은채 발견되었다.
백미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사건은 양반집의 아내가 벌인 사기까지로 번지고 만다.
백미의 자살?
도관 정랑 최민의 여식
백미의 살인은 노비로 재산을 잃고, 누명을 쓴것 때문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금이에 대한 조사 및 처벌에는 시일이 걸리는데 이는 금이의 아비가 도관 정량 최민이라는 자였기 때문이다.
도관 정량이란 지금으로 보면 노동부같은 것인데, 노비에 관한 법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정랑은 정오품이였다.
다른 용의자들보다 문초도 한번뿐이고, 수사는 지지부진 했다. 누가봐도 범죄에 범인이 누구인지도 명확한 사건에 처벌이 늦어지는건 어떤이유인지.. 최민이라는 자의 집안이 대단한 집이였기 때문일까?
또 그렇다면, 결국 비단을 처분하지도 않고 집에 둔 금이는 도대체 왜 사기를 했어야 했을까? 돈의 부족함도 아닐진데.
단지 재미를 위해서 였을까?
결국, 금이와 그의 남편은 도둑질과 은폐라는 죄로 곤장 백대에 변방으로의 유배가 결정되었다. 사기로 인해 사람까지 죽은 이 사건에서 제일 피해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고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백미라는 시종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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