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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잔혹범죄사

수양대군의 철퇴를 맞고도 죽지 않은 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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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하여지자 유시(流矢)가 떨어졌다.
위사(衛士)가 놀라 고하니, 이계전(李季甸)이 두려워하여 나팔을 불기를 청하였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그날 밤 김종서를 만나 그에게 말했다.

"비밀스럽게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수양은 김종서에게 편지를 전달했고, 김종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종서에게 수양대군은 마치 가시와도 같았다.

자신과는 앙숙과도 같았은 존재였기에 이렇게 한밤중에 나타난 그가 좋아보 일리가 없었다.

김종서는 편지를 펼쳐들었지만 어두운 밤에 종이에 쓴 글자가 잘 보일 리가 없었고, 김종서는 편지를 들어 달빛에 비추며 글을 읽어내려갔다.

그때였다.

"따악!!"

어느새 뒤로 다가온 수양대군의 부하 임어울운이 휘두른 철퇴가 그의 머리를 가격하며 김종서의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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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철퇴에 맞았지만 죽지 않고 여장을 하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의 최후이다.

우리는 흔히 그가 계유정난 당시 제일 먼저 희생된 인물이자 수양대군도 김종서가 자신의 계획에 제일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기에 꼭 죽여야만 하는 인물이었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종서가 철퇴를 맞았지만 죽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김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복(女服)을 입고서, 가마를 타고 돈의문(敦義門)·서소문(西小門)·숭례문(崇禮門) 세 문을 거쳐 이르렀으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 아들 김승벽(金承壁)의 처가(妻家)에 숨었다.

 

단종 1년 10월의 기록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그는 철퇴를 맞았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고 머리의 상처를 싸맨 채 여복까지 하며 성안으로 들어가 수양대군의 반란을 알리고 막으려 했지만 이미 성안의 상황은 수양대군의 군사들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종서의 묘(공주)

김종서,
결국 효수되다.

 

결국 김종서는 성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반란군의 눈을 피해 그의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숨어들지만 조정을 장악한 수양대군의 반란군은 결국 그를 발견하였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어버리고 만다.

기록엔 그가 효수되자 백성들이 그를 향해 욕을 하고 침을 뱉기도 하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비록 피의 군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쩌면 백성들에게는 김종서라는 인물도 수양대군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악인은 아니었을까?

어차피 기록은 승자의 편이다.

 


그날, 또 다른 여장

 

그날, 임금에게 반란을 알리기 위해 여장을 했던 김종서 외에도 여복을 한 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는 대정이라는 자로 태종의 막내아들인 성녕대군의 집으로 숨어들어 여복을 하고 침전의 뒤에 엎드려 숨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군사들이 그를 찾자 성녕대군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서둘러 그를 내보냈고 그대로 군사들에 의해 칼로 베어졌다고 한다.

 

김종서와는 달리 평생 사대부의 남자로 살던 양반이 최후에는 도망을 위해 여장을 하는 모습은 어쩌면 비겁한 모습은 아니었을까?


부록: 계유정난 미스터리
계유정난이 모두 끝난 그날 밤, 실록에는 기이한 일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한밤중에 달이 떨어지고 깜깜해지더나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르는 화살이 날아와 수양대군을 스쳤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군사가 나팔을 불기를 청하지만 수양대군이 웃으며 말하길,

"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조용히 하여 진압하라."

과연 화살을 누가 쏜 것이며, 수양대군은 어찌 그런 일에도 태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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