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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잔혹범죄사

시체의 목을 배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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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이희저의 수급과 함께 군민(軍民)에게 두루 보이고,
거리에 사흘 동안 걸어 놓은 뒤 팔방에 전해 보이게 하였다.

 

순조 12년, 홍경래가 서북지역의 차별로 인해 난을 일으켰지만 전주성에서 화살에 맞아 사망한 후 홍경래의 난은 제압된다. 그로 인해 관련된 죄를 물어 처형된 사람의 수가  2천가까이 되었다고 하니 엄청나게 큰 난이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세도정치와 지역차별,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을 보통 농민봉기라고 하는데, 이런 엄청난 규모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무었이였을까?


쉽게는 북한 지역을 생각하면 된다. 지금도 농사를 짓기 척박한 땅인데 이곳은 국경과도 가까워 북방 오랑캐의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백성들은 힘든 삶을 살아갈 수 밖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북쪽으로 가던 사람도 한양이남으로 내려오려고만 했고, 조정에서는 오히려 나라의 백성의 일부를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나라의 영토를 유지하려했다.

 

나라에서 이주를 시켰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척박한 땅과 굶주림, 그리고 차별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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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때에 이 차별은 극한까지 오는데, 나라의 관직들은 능력위주보다는 권문세가들의 상속관직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다보니 지역에 따라 권문세가가 있는 곳의 자녀들이 등용되는 일이 많았고, 특히 수렴청정으로 인해 외척의 세력이 커졌다. 그렇게 세도정치가 이루어져 부패할만큼 부패해 버린 조선, 왕은 그저 그들의 꼭두각시일뿐이었다.

엄청난 규모로 일어났던 봉기, 홍경래의 난

 

불안은 결국 홍경래의 난을 포함한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만다.

 

왕권에 도전하는 이들의 최후

순조는 난을 제압 후, 난에 가담한 인원뿐 아니라 도망을 쳤던 관리들까지 문책하고 처형했다. 

 

어느왕이든 자신의 지위를 노리는 것에는 가차없이 목을 배었는데 반란은 제일높은 형벌이였던 능지처참을 당하거나 성문 앞에서 거열되었다.

 

※ 능지처참(凌遲處斬) : 산 채로 살을 회뜨는 형벌로, 사형 중에서도 반역 등 일급의 중죄인에게 실시하는 가장 무거운 형벌로 중국에선 1900년대 초까지도 해당 형벌이 이어져 사진으로 남아있다.

※ 거열(車裂) : 죄인의 사지와 머리를 말이나 소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형벌로 거열은 전세계적으로 행해진 형벌중에 하나다.

 

투팍 아마루 2세(페루) 의 거열

 

보통 지방에서 처형 된 역모의 수급이 모두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왕이 있는 곳, 한양은 법으로 무덤을 만들 수 없었으며 시체를 가지고 들어 올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수급을 헌괵(獻馘)하여 왕에게 가져갔는데 헌괵은 죄인을 처형한 후 보통은 그의 귀를 잘라 왕에게 보내는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에더해 순조는 홍경래를 비롯한 역도의 무리의 수급을 잘라 각 고을에 보내어 두루 보이게 하였는데 이는 왕권에 도전하는 이들의 마지막을 각 고을에 관리와 백성에게 보여줌으로써 왕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주는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소금으로 절여져 흙빛이 된 시체의 목을 보는 지방관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비단 이렇게 처리했던 왕은 순조뿐만이 아니였는데, 영조도 이인좌의 난 이후 관련 역모들의 수급을 각 지방으로 보내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 효시(梟示) :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의 목을 베어 매달아 군중 앞에 공시함으로써 대중을 경계시키던 일이다. 효수(梟首)라고도 한다.

 

순조의 무덤인 인릉과 영조의 무덤 원릉

 

아이러니 하게도 순조는 영조와도 연결되는데 순조가 즉위하고 수렴청정을 했는데 그가 바로 영조의 비 정순왕후였다.

영조와 닮은 점은 하나가 더 있는데 둘 다 자신이 대리청정을 맡긴 아들이 일찍 죽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였고 순조는 이름을 생각하면 박보검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효명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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