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잔뜩 껴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였다.
아래서 위로 낫같은 것으로 난자당한 채 발견되었다.
여름날 문회소(文會所)에서 발생한 살인으로 인해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그날은 문회소에서 유생들이 모여 자신의 시를 겨루는 행사로 인해 작은 문회소가 가득차 잠자기도 좁은 상태였다.
구름이 잔뜩 껴 칠흙같이 어두운 밤.
손으로 느껴지는 축축함에 잠에서 깬 유생은 자신의 옆자리에 목부터 배까지 베여 창자가 밖으로 나와 죽은 시신을 보고 놀라고 만다.
※ 문회소(文會所) : 시문 따위를 지어 서로 비평하는 모임이 열리는 곳.
원한의 의한 살인? 피의자는 어떻게 식별했는가?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누군가를 목표로 살인하는 것이 가능한가?
제일 처음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피해자의 양옆에서 자고있던 유생들이었지만 특별한 혐의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살해한 방법은 무엇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살해한 방법과 그 흉기를 찾는것은 조선시대에도 선행되는 일이었다.
시체는 너무 처참하게 목부터 배까지 베어져 있었고, 복부부분이 깊고 목부분은 상대적으로 얇아보이는것으로 보아 복부부터 베인것으로 판단되었다.
원한에 의한 살인
범행수법이 절대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이는 깊은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 판단하고 조사하니, 피해자의 집 근처에 사는 과부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피해자는 과거 그녀의 남편을 관아에 신고하여 남편이 옥중에 고초로 사망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알리바이가 존재하였다.
사건은 주변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진행이 된다.
조선시대의 수사는 증거보단 주변사람들의 증언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범인의 자백이 결정적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은 심문을 위한 고문도 가능하였다. 때문에 거짓자백도 많았고,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고문이 일반화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확실한 증언이나 증거등을 토대로 진행되었는데, 증언 중의 일부는 다른이들의 증언과 맞지 않거나 의심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 사례도 그랬는데 문회소 근처에 살던 한 남자의 증언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그 새벽에 집에서 나왔다고 증언한 시간이 남자의 아내가 증언한 시간과 한시진가까이 차이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스라이팅? 선동?
결국 범인은 이웃집 남자였다.
남자는 과부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관아에 고발건으로 인해 과부의 원망스런 소리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그 과부의 원한이 그대로 남자에게도 증오가 되어 과부와 사건을 공모하기에 이르고 만다.
잘못된 선택이 참형을 면할 수 없는 죄를 짓게 만든 것이었다.
여기서 정조의 판단은 달랐다.
비록 사람을 끔찍하게 죽인 일이었지만 살인을 직접 실행에 옮긴 남자에겐 참형을, 살인을 지시한 과부에겐 가벼운 형량만을 내린다.
이는 죽은 남편을 위한 과부의 기특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조선시대는 남편에게 충성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으니 어쩌랴?
그런데, 이러면 남자의 아내도 억울하게 과부가 되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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