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 만든 불행의 씨
임금이 화평 옹주를 생각하는 슬픔이 심하여 자주 그 집에 거둥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딸바보였던 영조
영조 25년, 정 5품 교리였던 서지수는 5월 날씨에도 몸이 살짝 떨렸고, 심지어 아직 덥지도 않은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지난날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제택에 거둥하시어 밤늦게 궁궐로 돌아오는 실수를 범하셨습니다."
서지수는 최대한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금에게 고했다.
임금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딸을 여전히 잊지 못한 채 여러 번 그녀가 없는 그녀의 집으로 거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밤늦은 시간 임금을 보호하는 군대가 근처에서 야영을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서지수는 하던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임금이 불같이 화를 내었기 때문이었고 결국 서지수는 하던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의 옆에 있던 부교리 이응협은 그저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유난히 편애했던 옹주들.
영조, 그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일 정도로 냉정한 인물이자 괴짜였는데 그런 성격 때문일까? 영조는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자식들 중 영빈 이 씨의 두 딸,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어여삐 여겼다.
특히 화평옹주에 대한 사랑은 유달랐는데, 영조는 화평옹주를 만날 때면 당시 사도세자 이선을 먼저 만나 아무 말이나 한 뒤, 준비되어 있던 물로 귀를 씻고 난 뒤 그 씻은 물을 영빈이씨의 동복여동생 화협옹주가 기거하는 집 방향으로 버리고 난 뒤에 만났는데 사도를 부정한 것으로, 화협옹주를 액받이로 쓰는 행위였다.
그 모습을 알고 있던 사도세자는 화협옹주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씻는 준비 단계구나"라며 자조했다는 기록이 한중록에 남아있을 정도니 얼마나 딸 하나를 총애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화평 옹주가 사망하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받던 딸도 22살의 나이에 첫째를 낳다가 요절하고 마는데, 이때 영조의 슬픔을 신하들이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길 원했다. 당연하게도 대신들은 이를 반대하기에 영조는 반대하던 대신들을 파직해버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화평옹주의 3년 상이 끝날때 쯤 사도세자의 정비였던 혜경궁 홍씨가 첫째 아들을 낳았지만 영조는 아는 채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에 혜경궁 홍씨가 낳은 첫째 아들의 어깨 부분에 있는 점을 보고 같은 자리에 점이 있던 화평 옹주의 환생으로 여겼다고 하는 야사가 전해지는데 그런 세손도 그만 일찍 요절하고 만다.
세손이 죽을 당시, 어미였던 혜경궁 홍씨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영조는 세손이 죽었는데 아이를 임신했다며 타박할정도였다고 하는데, 당시 혜경궁 홍씨가 임신했더 둘째가 바로 훗날 정조가 되는 이산이다.(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타박했지만 막상 이산의 총명함에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왕이 영조이다)
사도세자의 비극, 아비보다 일찍 죽어버린 자녀들
우연인지는 몰라도 영조의 자녀들은 일찍이 요절하고 마는데, 사도세자와 우애가 돈독했던 화합 옹주도 20살의 나이에 죽었고, 화평옹주 역시 22살, 사도세자의 경우도 28세에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혹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리고 자신의 다른자녀들을 고작 애정했던 자녀의 액받이 정도로만 썼던 영조의 행동이 자신의 자녀들을 불행으로 이끌었던 건 아닐까?
※ 위 관련 내용은 제 개인적인 사견이 섞여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