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이의 머리를 잘라 저주하다.
바로 전에 수구문(水口門) 밖에서,
두 여자가 성 밑에 버려진 시체의 머리를
칼로 잘라 포대에 감추는 것을 보았다.
인조12년, 포도청에서는 근래에 인심이 사나와 남을 저주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전해오며 한가지 사건을 아뢴다. 인심좋기로 이름난 조선, 그속에서 남을 저주하는 일이 빈번하다니?
이건 또 무슨 기괴한 일인가?
민심이 피폐했던 시기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 인조, 가까운나라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던 시기였지만, 반금친명정책을 핀 조정으로 인해 청나라에 눈밖에 나게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격으면서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당시 집권당이였던 서인은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던건 지금도 권력자들이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인것일까? 국가의 국방도, 경제도 나아지지 않았고 굶어 죽는 이가 수십이요, 죽은이의 살을 먹었다는 기록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수구문밖에 버려진 시체
조선시대는 철저히 도성안에서의 무덤을 만들 수 없었다.
그렇기에 대부분 시체를 성밖으로 내어 갔으며, 성 밖엔 공동묘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인조시대에는 시체가 성문밖에 방치될정도 였다고 하니 전쟁과 기아로 인한 백성들의 삶이 짐작되리라..
사건은 수구문 밖에서 벌어진다.
수구문 밖에서 왠 아낙 둘이 시체의 머리와 뼈를 수급하고 있는것을 본 관군이 두 아낙을 쫓아 하나는 도망가고 하나는 잡기에 이른다. 한 아낙을 추궁하여 도망갔던 아낙을 추포하는데 그녀는 맹인 박귀복의 아내였다. 그 여성들은 무슨연유로 시체의 머리를 자르고 있었던 걸까?
증오로 인한 저주
둘을 잡아 추궁하니 증언하기를, 종루(鍾樓) 노변에 사는 자근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사위가 다른여자를 첩으로 들인 것에 분해 많은 돈을 주고 저주를 위해 시체의 뼈와 머리를 구해오라 하여 벌인 일이였다.
또 증언하기를 이런일이 자주 있는데 걸린것은 이번 한번이라는 진술이였다. 시체를 가지고 남을 저주하는 일이 비일비제 했다는 것이다.
의문으로 남은 옥사
포도청은 해당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 문초를 하였지만, 고문도중 옥사를 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의 옥사는 독살일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저주를 내려달라던 이도, 저주를 위해 시체를 수급하던 이들도 모두 사망하는 사건에 독살은 심히 의심할만 한 일 아닌가? 과연 그들을 저주하여 사망하게 한 이는 또 누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