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갑신정변과 연좌제를 피한 누이
반란을 음모한 무도한 큰 역적인 김옥균에 대해서는 이미 형률에 따라 형벌을 정하였습니다.
마땅히 연좌된 여러 사람은 하나하나 조사하여 성책(成冊)을 작성하여 첩보(牒報)한 뒤에 거행하고..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었던 갑신정변이 3일 만에 허무하게 끝이 나고, 김옥균을 포함한 갑신정변의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끝없는 조선의 암살 시도와 차갑기만 한 일본의 태도에 결국 모든 인물들이 암살당하거나 잡혀 본국으로 압송당한다.
김옥균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이에서 홍종문에게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는 조선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또다시 거열을 당한다. 반란과, 반역의 죄는 당사자 뿐 아니라 3대를 걸쳐 연좌제를 물었기에 그의 가족도 무사할 수 없었다.
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정변
갑신정변은 그 당시 명성황후의 세력이 청과 결탁하여 청의 속국으로 전략되어만 가는 것 같은 나라를 바로잡고자 시작된 난이었다. 고종의 왕권을 강화하고 명성황후의 외가 세력의 약화를 노렸지만 3일 만에 도움을 받으려 했던 일본군이 청군의 앞도적인 숫자에 겁을 먹고 철수하며 실패로 돌아간다.
실패한 쿠데타, 결국 주동자의 삼대가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는데 김옥균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란의 주동자는 그와 삼대를 멸하라.
김옥균의 아버지는 연좌제에 의해 효수되었고, 동생은 형의 소식을 듣고 도망하였지만 이내 잡혀 옥사하였다.
어머니는 누이와 함께 음독자살을 해야했으며, 유일하게 김옥균의 처와 아직 어렸던 딸만은 죽음을 면하였는데 대신 관비로 전락하였다.
누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다.
김옥균의 매제였던 송 씨의 재혼식이 있던 날, 신부는 유난히 화장이 짙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결혼을 한 송 씨는 부랴부랴 천안으로 이사를 갔는데 누구도 새 장가를 든 송 씨의 신부가 김옥균의 누이였던 김균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어찌 된 일이었을까?
연좌제에 의해 사형을 받은 김균은 처참하게 죽느니 스스로 죽는 것을 택하겠다며 비산을 먹었고 그대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송 씨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거짓 장례식을 치른다. 그 1년 뒤 그녀와 다시 결혼을 했던 것이다.
송 씨의 아내 사랑이 그녀를 살렸던 것이다.
김옥균의 사망 이후..
김옥균의 사망 이후 이듬해 반란죄는 사면되었고, 규장각의 대제학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개혁과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썼던 그를 위해 늦게나마 장례를 치러 주려 했지만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기에 일본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머리카락과 소지품을 모아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장례가 치러지던 곳에 노파 하나가 힘들어보이는 몸을 이끌고 무덤에 다가와 서럽게 울었는데 그녀가 바로 간신히 살아남은 김옥균의 누이 김균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사상은 살아있을 때는 무시당했지만 일제에 의해 죽은 뒤 사용되었다.
일제는 김옥균이 죽은 뒤 김옥균 암살의 배후에 청이 있다며 압박했고, 김옥균이 주장한 삼화주의(중국,조선,일본이 화합하여 아시아의 중심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상)를 악용해 대륙 침략에 이용하는 등, 자신들의 만행을 합리화하는 곳에 널리 쓰였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과연 누구보다 먼저 생각이 앞서있었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바랐던 사상가 김옥균이 원했던 나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