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男寺黨), 떠도는 예술가들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
유랑민중놀이패
전국을 돌며 다양한 묘기와 음악을 선보이는 놀이패는 조선후기의 역사서 [해동역사]에 의하면 신라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후기엔 그것을 사당패라 하여,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여성들이 노래와 춤을 추기 시작했고, 말기엔 남자들만으로 구성되어 남사당패라는 유랑집단이 생겨났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갑이)’를 정점으로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가지 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보수가 없어도 숙식만 제공받게 된다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남사당패의 구성
이름에도 그렇듯 남자로만 구성된 남사당패는 약 50여명정도로 구성되며,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중심으로 마을의 허락을 받아오는 조직의 2인자격인 '곰뱅이쇠', 각 묘기의 조장격인 '뜬쇠', 실제 묘기를 담당하는 '가열'과 아직 수련중인 '삐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나이가 먹거나 크게 다쳐 공연을 할 수 없는 '저승패'로 구성되었다.
꼭두쇠를 중심으로 한명, 또는 두명의 곰뱅이쇠를 두는데, 그들은 주로 마을에 내려가 공연을 허락받는 일을 맡아했고,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사당패에서 중요한 밥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 밑으로 뜬쇠라고 하여, 6가지의 놀이에 대한 조장을 두었고, 그 뜬쇠의 밑으로 해당 놀이의 예능을 익힌 가열을 두었다.
삐리는 이제 막 사당패에 입문한 초보자들로 주로 패의 잔신부름을 담당하며, 하나, 또는 두개 이상의 기능을 익혀 가열이 되기 전의 인원들로 그들은 가열이 되기 전까진 여장을 해야만 하는 상례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들은 숫동모와 암동모로 나누는데, 숫동모는 남자역할, 암동모는 여자역할을 담당했고, 예상한대로 암동모는 주로 삐리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 왕의남자의 '공길'이 암동모이다.(줄타는거 보면 삐리는 아닌것 같은데 말이다.)
남사당패끼리 삐리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는데 이는 자신들의 몫으로 암동모를 가지는것에 목적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반반한 암동모의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 내 생각인데, 사댕패의 시작이 술자리에서 여성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하니, 아마 그런쪽으로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인원충원은 주로 마을에서 더이상 키울 수 없는 아이들 거두거나 고아, 또는 유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정받지 못한 놀이패
남사당패와 같은 유랑집단은 흔히 말하는 '광대'나 '예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는데 이들은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으로 불리며 저급한 취급을 받아 역사나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는다.
이후 조선 말기부터 유행을 타던 남사당패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 명맥이 사라지는 듯했다가 전쟁 후 하나둘 다시 모이기 시작했지만 TV의 보급등으로 예전만큼의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추후, 남사당패의 일원이었던 김덕수님이 일부를 변형하여 들으면 절로 신나는 가락을 만들어 놀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아는 [사물놀이]로, 그렇게 다시 명맥을 이어내려오고 있다.
남사당패의 특징으로 그들은 공연내용은 주로 사대부를 풍자하여, 웃음을 주었기에 권력층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힘든 세상을 잊었던 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없는데선 나랏님도 욕한다'고 하지 않던가?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