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잔혹범죄사

十五円五十銭(십오엔 오십전).

기묘담녀 2025. 5. 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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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円五十銭(15엔 50전-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규모 7.9의 지진으로 도쿄와 요코하마등, 당시에도 대도시였던 곳에서 지진으로 발생한 화재와 건물 붕괴로 인해 약 10~14만명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사회는 극심한 혼란으로 이어졌고, 이 혼란을 풀어야만 했던 일본인들은 그 증오를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외국인(특히 조선인)에게 돌리기 시작합니다.

 

유언비어가 퍼지다.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 폭탄에 의한 태러 및 강도를 계획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이는, 당시 경찰의 내부문서의 내용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팽배했던 조선인에 대한 혐오가 그대로 녹아있는 이 문서는 다른 유언비어와 합쳐지며 당시 메이저 언론이었던 아사히, 요미우리 신문등이 기사를 내었고, 이는 조선인들의 혐오를 더욱 부추기는 계기를 만든다.

1923년 9월1일자 매일신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기사를 전면에 실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일본인을 습격하는 것을 보았다!

 

결국 소문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고, 자경단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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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에 기록된 조선인 학살

 

1923년 12월 15일에 제출된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가 작성한 [간토지방 지진관계 업무 상보]에 의하면 사건은 1923년 9월 4일, 대지진이 발생한지 고작 사흘만에 벌어진 일이다.

 

당시 경찰은 조선인 200여명을 경찰서로 이송하던 중 발생된 사건으로 낮에 이동하지 못한 조선인 40여명이 성난 군중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다는 기록이었다.

 

해당 공문서엔 "조선인 습격은 없었다","방화도 없었다","독을 넣었다는것도 듣지못했다"라고 적으며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고, 오히려 습격하여 조선인들을 살해한 이들을 "사리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무리"라고 지칭하기 까지 한다.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15엔 50전

 

하지만, 조선인이 8000여명에서 1만명이상이 살해될때까지도 정부는 암묵적으로 묵인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국가적인 재난으로 인한 증오가 정부로 향하는 것을 막기위해 조선인들을 희생시킨건 아닐까요?

 

이들 자칭 자경단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한국어엔 많이 쓰이지 않는 탁음이 많은  "십오엔 오십전(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을 발음하기 하거나 "가기구게고" 또는 기미가요를 부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국가적인 재난이 발생했을때, 사람들은 증오를 풀 대상을 찾는다.

이는 자신의 어려움을 그런식으로라도 풀어버리려는 본능과도 같은 것으로, 이로인해 많은이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이는 여전히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장난으로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분할때 15엔 50전을 말해보라고 한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혐오와 증오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삶에 스며들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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